이른 아침 연세가 있으신 지인분이 ‘가는 세월’이란 노래를 보내주셨다. 주부로서 할 일을 하면서 노래를 들었다. 따라 부르기도 하고 ‘가는 세월 그 누가 잡을 수가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 아기들이 자라나서 어른이 되듯이 슬픔과 행복 속에 우리도 변했구료’ 흥얼흥얼 따라 부르다 지나온 세월이 파도처럼 달려왔다. 내 나이 하늘로 가신 엄니의 나이가 되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는 자식을 두고 있다. 철없던 실절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외쳤건만. 지금, 예전의 엄니처럼 살고 있다. “이것도 모르냐?”는 구박 아닌 구박을 받으며...

밥만 먹이면 되는 시절이 있었다. 엄니는 자식들을 굶기지 않으려 오직 밥에만 열중하셨다. 그런 자식들은 밥보다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는 엄니를 더 원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엄니가 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속상했을까! 지금 난 애들 앞에서 소극적으로 외치며 울기라도 하지만, 엄니는... “니들도 내 나이 돼 봐!” 하면서 지난날을 엄니께 속죄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어릴 때 아이들을 키우면서 혼냈던 것을 되돌려 받는 느낌은 왜일까. 나는 사춘기 아이처럼 눈물 콧물 찔끔거리며 반항이라도 해보지만, 엄니는 말없이 속을 삭였을 한이 잉걸불이 되었을 게다.

아이를 키울 때 아이가 “이게 모야?”하고 물으면 기특하고 신기해서 반복 되는 질문에도 지치지 않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해주곤 했다. 그런데 디지털 문맹인 내가 아이들한테 디지털 기기에 대해 물으면 마지못해 한 번은 가르쳐준다. 어찌. 한 번으로 되겠나. 서툴기도 하고 금방 잊어버리기도 하여 다시 물으면 “이것도 모르냐? 아까 가르쳐 줬잖느냐”가 바로 나온다. 그 말에 유치원생처럼 주눅이 들어 다시는 묻지를 못한다. 혼자서 끙끙 거리다 자식 아닌 남의 자식에게 묻는다. 오히려 그것이 더 편할 때가 있다.

나는 디지털 문맹이지만 엄니는 글자를 접한 적이 없다. 말 그대로 글자 자체를 모르는 문맹이었다. 버스를 탈 때도 글을 모르니 글자를 그림으로 익혀서 타셨다 했다. 참 지혜로우셨다. 엄니는 한 번도 글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도 모르게 “이것도 모르냐? 고 했을 듯싶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엄니와는 다른 시대의 문맹이 된 나의 모습은 일에 치여 밥만 해주던 엄니와 다를 바 없다. 나는 열심히 뛰고 있는데 자식들 눈에는 제 자리 걸음, 노력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는 듯 하여 속상할 때가 있다. 가는 세월을 어찌 막을 수가 있을까.

시대가 급변하고 있다. 엄니의 시대보다 내 뛰놀던 시절보다 소리의 시대를 지나 빛의 속도로 시대는 변하고 있다. 어디를 가나 디지털 AI가 사람을 맞이하고 있다. 낯선 기계를 마주한 어른들은 기계 앞에서 어설프게 서성거린다. 그 모습을 젊은이들은 이해를 못하고 ‘왜? 이것도 못하지?’라고 한다. 나 때는 이런 것이 없었다고 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오직 못하는 것에만 질책할 뿐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고군분투하며 디지털 수업을 들으며 애써 기계와 친해 보려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굳어진 머리와 손은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다. 너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계와 같이 자랐지만 나 때는 이런 것이 없었다. 그래서 무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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