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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식 한양대학교 체육학과 겸임교수 “100세 넘은 어머니·장모님, 함께 살고 있으니 나는 행복합니다”

기사승인 2020.07.08  11: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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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권도·유도·합기도·검도 합쳐 21단 소유 체육인
대학에서 체육강의하며 스타프라자서 체육사 운영

강성식 한양대학교 체육학과 겸임교수의 얼굴은 청아했다. 맑고 밝은 표정이 그냥 나오는것은 아니었다. 그는 101세인 어머니와 100세가 된 장모님이 계시다고 했다. 한때는 어머니와 장모님을 한집에서 모시고 살았다. 강성식 교수가 자신이 운영하는 체육사에서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사진=최제영 大記者

강성식 한양대학교 체육학과 겸임교수의 얼굴은 깨끗하고 청아했다. 맑고 밝은 표정이 그냥 나오는것은 아니었다. 그는 101세인 어머니와 100세가 된 장모님이 계시다고 했다. 그래서 부자라고 했다. 한때는 어머니와 장모님을 한집에서 모시고 살았다. 지금은 어머님은 누나가 모시고 있고 장모님만 자신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강성식 교수는 조만간 6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어머니의 품속이 편안하다고 했다. 타고난 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학에서 체육을 가르치면서 스타프라자에서 체육사를 운영하고 있다. 벌써 36년째라고 했다. 태권도 등을 합쳐 모두 21단을 소지하고 한때 국가대표 육상 상비군으로 활동했다.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집앞 노적봉을 예찬했다. 그는 예술인 아파트에서 오래 살고 있다고 했다. 가진 돈은 없지만 수만평의 노적봉이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부유함으로 느낀다고 했다. 강성식 교수를 만나 어머니와 장모님의 애뜻한 사랑얘기를 들어봤다.

 

Q 먼저 어머니와 장모님 얘기를 들어봐야겠다.

나의 어머니는 1919년생이다. 만으로 101세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도 어릴적 품에 안기던 그 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세월이 흘러 늙으셨지만 내마음 속의 어머니는 예전처럼 팽팽한 얼굴 그 자체다. 늘 함께 있어도 편안한 존재이기도 하다. 장모님은 1920년생으로 100세가 되셨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나 다를바가 없다. 장모님 역시 나를 아들로 여기면서 지금까지 살고 계시다. 어찌보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Q 두분이 한집에서 같이 살았나.

맞는 말이다 3년간이나 우리집에서 같이 살았다. 남들은 사돈끼리 어떻게 한집에서 살수 있냐고 물은 적도 있지만 우리는 늘상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흔히 사돈은 멀리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분이서 때로는 친구같이 또는 친자매처럼 오손도손 살았다. 어머니와 장모님 우정으로 우리 부부도 덩달아 사랑이 넘쳐나는 기분이었다. 두분이서 서로 의지하면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때로는 웃고 울었다.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성식 교수가 어머니 옆에서 애교를 떨고 있는 모습이다. 강 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Q 한집에 살면서 에피소드도 많을텐데.

여러가지 일들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바로 앞에서 얘기하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청각이 좋지 않다. 대화를 하면 얼굴을 보고 표정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심해지고 있다. 장모님은 앞을 보지못할 정도로 시력이 안좋은 편이다. 신체 어느곳이나 모두 소중하지만 귀와 눈은 생활을 하는데 필수적이다. 평소 눈과 귀 중에 어느쪽이 소중할까 곰곰히 생각을 한적이 있다. 시끄런 세상 일을 듣고싶지 않아 좋고 눈꼴 나사운 세상을 볼수 없으니 때로는 행복하지 않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강성식 교수가 장모님과 함께 노적봉 공원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장 교수는 어머니와 장모님이 한집에서 지내면서 깊은 정을 주고받았다고 말했다.

Q 지금도 마찬가지인가.

지금은 장모님만 모시고 살고있다. 어머니는 오산에 있는 누님이 모시고 있다. 남들은 어머니보다 장모님이 더 중요하냐고 묻지만 나에게는 두분 모두 어머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8남내 중 막내다. 그런 탓인지 어머니 품속은 늘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 어머니가 45세 되던 해에 나를 낳으셨다. 지금은 장모님만 모시고 있는데, 점점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오산에 계신 어머니를 자주 보러가지만 같이 사는 것만은 못하다. 좀 아쉽고 보고 싶을때가 많다.

Q 원래 체육인 아닌가.

그렇다. 육상 특기자로 충남 삽교고등학교를 입학했지만 1년만에 해체되면서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좌절은 순간이었고 체육인의 길은 계속 이어졌다. 육상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활동했고 전국체전에서 멀리뛰기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서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던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포기하는 아픔을 겪었다. 나는 한양대에서 체육학을 전공했다.

Q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1996년 한양대 교육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난뒤, 그해부터 한양대에서 체육학 강의를 시작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길로 인생을 살게 된것이다. 그 강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나는 태권도·유도·합기도·검도 등을 합쳐 모두 공인 21단 소유자이기도 하다. 운동을 그만큼 좋아한다는 얘기다.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선생님 구두를 닦으면서 용돈을 벌기 시작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오로지 운동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릴적부터 의지력이 강했다.

Q 체육을 전공하고 체육사도 운영하고 있지 않나.

타고난 체육인 임에는 틀림이 없다. 수십년간 예술인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 어머니와 장모님을 모셨다. 예술인 아파트 옆에 있는 스타프라자에서 1985년부터 한양체육사를 운영하고 있다. 참으로 오래된 얘기다. 스포츠 용품을 팔고 있는데 역사가 깊은 곳이다. 나의 젊음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큰돈은 벌지 못했지만 언제나 행복하다고 자부하면서 살고 있다. 집앞에 있는 노적봉이 나의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공기좋고 숲이 우거진 노적봉 공원이 내것이라는 마음으로 산보를 즐기고 운동도 하고있다.

Q 다시 어머니와 장모님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평소에 어머님이나 장모님을 요양원에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 사람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아있는 한은 생을 마감하시는 날까지 우리집에서 돌봐드릴 생각이다. 이건 오랜기간 간직해온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최근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았다. 어머니와 장모님을 모시기 위한 방편이다. 부모없이 내가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머니와 장모님의 표정을 볼때가 많다. 어린 아이처럼 때묻지 않은 얼굴을 보면서 자연의 법칙을 느끼기도 한다. 세월은 누구나 비켜갈수 없다. 나도 그렇게 늙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강성식 교수가 가족과 나란히 함께하고 있다. 강 교수는 30년 넘게 한양대에서 체육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의 노적봉 공원이 있어 안산에서 가장 부자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는 말로 들렸다.

Q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한다.

얘기를 하다보니 쑥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나 부모님에게 효도하려는 자세는 되어있다. 나 또한 평범한 아들이고 사위일 뿐이다. 지금도 어머니 품속에 있으면 어릴적 생각이 많이 난다. 어머니 역시 장성한 아들을 보면서 어린애 처럼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게된다. 그동안 체육을 가르치는 강사로 열심히 일해왔다. 체육사에서 돈도 어느정도 벌어봤다. 인생은 늘 후회하면서 사는 법이다. 언제나 내가 제일 행복하다는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지금길이다. 나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그들에게도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인터뷰= 최제영  大記者

최제영 기자 cjy1010@ians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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