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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내가 아니다

기사승인 2020.01.15  20:4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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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새로운 한해가 시작된다. 그 말인즉슨, 나이가 한 살 더 들었다는 소리다. 말할 때 낱말이 생각 안 나서 애먹은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한 살 더’가 주는 무게가 남다르다. 분명히 새해라고 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게 없음에도 예민한 촉수가 발동한다. 요즘 들어 부쩍 뇌세포가 죽은 듯도 하고, 치매 이야기가 나오면 머지않아 내게 다가올 일인 양 가슴을 쓸어내린다.

한때 기억력과 꼼꼼함의 대명사 되시겠다. 집안 대소사를 기억하는 것은 물론, 물건 찾기나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했나를 떠올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일렬로 늘어선 기억줄을 붙잡고 장소와 시간을 꿰어 내놓으면 지난 일도 그대로 생생한 현재가 되곤 했다. 서로의 기억이 달라 머리를 맞대고 추리해 보면, 내 말이 맞는 경우가 많아 신뢰는 물론, 큰소리까지 덤으로 챙겼다. 그렇게 천년만년 기억력과 꼼꼼함을 무기 삼아 살고지고 하는 줄 알았다.

어느 날부턴가 내 머릿속에 불투명 테이프가 덧씌워진 느낌이다. 김영하의 소설에 ‘오랜 시간 마취됐다가 깨어난 사람은 원래의 그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복사물’이라더니, 분명 같은 사람인데 난 참 많이 달라져 있다. 여러 번의 전신마취를 하면서 기억저장고에 탈이 났는지, 많은 것이 엉클어져 버렸다. 총총한 기억력은 옛일, 지금은 갸웃거리면서 남의 기억에 의지해 내 날들을 되돌아보는 경우가 잦다. 처음엔 생소한 모습에 신경이 많이 쓰였으나, 이젠 무뎌져 그러려니 받아들인다. 그래야 산다.

기억력을 접고 나니, 꼼꼼함에 매달리게 되더라. 원래 성격이기도 하거니와 머리를 쓰지 않고도 천천히 가기만 하면 꼼꼼함은 챙길 수 있기에 난 무슨 일에든 신중을 기한다. 때로 답답함에 제풀에 지쳐 포기하거나, 그 과정의 복잡함이 머릿속에 그려져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부작용을 겪긴 하지만 실수가 별로 없다. 더디지만 세상을 살아내는 내 나름의 방식이다. 꼼꼼함은 최근까지 분명 내 자부심 뿜뿜 요소였다.

조만간 타이틀을 반납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가끔 홍삼과 물을 슬로우 쿠커에 넣고 저온으로 끓여 홍삼물을 만드느라 부지런을 떤다. 아홉 번 찌고 말려 직접 만든 홍삼을 스무 시간 동안 끓여 가족들에게 내밀 때의 내 유세는 하늘을 찌른다. 면역력에 좋기도 하거니와 갈증 해소에 뛰어난 것을 몸소 체험한 가족들이 너나없이 찾는 홍삼물의 위력은 클 수밖에 없다. 어디서도 쉽게 맛볼 수 없는 목넘김이 깔끔한 물이기에 가족들에게 내미는 손길도 당당하다.

얼마 전의 일이다. 그 날 바빴었노라 방어막 한 바가지 미리 쏟아 놓고 고백한다. 홍삼 세 뿌리, 물 5리터 넣고 버튼 조작하고 스무 시간만 기다리면 되는 초간단 레시피에서 깜짝 실수가 나오고 말았다. 물을 정수기에서 받아 버튼 조작만 하고 과감히 뚜껑 닫고 스무 시간을 기다릴 때까지 까마득히 몰랐다. 다 됐겠지 하고 홍삼물을 퍼 식히려고 뚜껑을 여는데 이상하게 물이 맑다. 순간 아찔했다. 맹물을 끓이면서 깔끔하게 접어둔 의심이 낯설다. 아무도 몰래 얼른 홍삼 세 뿌리를 넣고 다시 스무 시간 버튼을 조작했다. 결국 마흔 시간을 들여 만든 홍삼물을 내놓으며 실수를 털어놓으니, 식구들이 웃느라 난리다. 그제서야 여유를 찾았지만 꼼꼼함에도 스크래치가 나고 말았으니, 이 사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직 생각 중이다.

뭐 그까짓 것 하나 갖고 유난을 떠냐고 하겠지만, 좀체 벌어지지 않았던 일이라 충격이 조금 있다. 기억력도 처음엔 그랬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퓨즈가 나가더니, 점차로 큰일까지 잊는 경우가 생기더라. 설마 기억력처럼 이 사건 하나가 전조 증상이 되어 꼼꼼함을 놓게 되는 건 아니겠지. 점점 겁쟁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

새해엔 한번쯤 돌다리를 두드려 볼 일이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지만, ‘나’의 상태를 점검해 뇌를 말랑말랑하게 해 놓기에 좋은 시기다. 다가오는 변화에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더 이상 기억력 좋고 꼼꼼한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반월신문 webmaster@banw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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