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득, 일제히 날아오른다. 방금 전까지 귓속 가득 수다를 채워 넣던 직박구리들이 폭죽 터지듯 사방으로 흩어진다. 서둘러 떠나며 내게 원망이라도 쏟아내는지 울음소리는 한층 커진다. 다디단 식사 시간을 방해한 불청객을 향한 볼멘소리가 쨍한 허공에 금을 긋는다.

단풍의 계절을 한참 지났건만 마당은 여전히 붉은 물을 머금고 있다. 햇살 한 점이라도 다 빨아들여 단맛을 내려는 대봉시 덕분에 계절이 더디 간다. 잎을 다 떨어트린 나무들 사이에서 열매를 매단 모습은 아직 가을인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온기에 이끌려 감나무 아래에 가만히 선다. 문득,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하늘 어디쯤이라 생각해 본 적 없건만 괜히 시큰해진다. 한 해 사이 양가 어른 두 분이나 오르셨으니, 안부를 전해 주실 법도 하다.

아버지가 온다. 해마다 잘 익고 굵은 감을 골라 한 상자 가득 담아 아버지에게로 가던 길은 전교 1등한 성적표를 들고 가는 기분과 맞먹었다.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해 감나무를 본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아버지였다. 고향과 먼 곳에 뿌리 내린 아버지는 향수를 감이나 곶감, 젓갈로 달랬다. 겨우내 내가 가져다 드린 감을 하나씩 아껴 드시면서 아버지는 짠내 나는 전라도 땅 어딘가를 헤맸을지도 모를 일이다. 감을 달게 드셨던, 더 이상 볼 수 없는 아버지 얼굴이 흐릿하게 스친다.

시어머니도 온다. 과일이란 과일은 다 좋아한 어머니께 달뜬 표정으로 마당에서 딴 감을 갖다 드렸을 때, 환히 웃던 모습이 생생하다. 사서 먹는 감보다 백배는 더 맛있다고 좋아하던 어머니는 신장암을 앓고 난 뒤에는 아예 가져오지 말라 하셨다. 신장에 무리를 준다는 소리에 딱 끊으면서도, 어머니는 매년 감은 잘 달렸더냐 물으며 아쉬움을 달래셨다. 시어머니는, 넌지시 다시 가져다 드린 감을 두 해 더 드시고 떠났다.

마당 있는 주택으로 이사 온 지 7년이 되어간다. 감나무는 해가 갈수록 이야기를 쌓아간다. 받은 감을 또 다른 이웃과 나눠 먹던 사람들, 고마워하며 환히 웃던 얼굴들 덕분에 나눌 몫을 점점 늘인다. 이사 왔던 첫해엔 까치밥을 남기면서도 아까워했다. 추운 지역에서 자라서 감나무를 본 적 없었기에, 감나무로 비롯된 마당의 다양한 풍경들이 귀하고 신기했다. 감은 또 어찌나 아까웠는지, 돋움발을 하고 장대를 높이 쳐들어 딸 수 있을 만큼 땄다.

이제는 애써 다 따려고 발을 들지 않는다. 새들에게 넉넉히 남겨 주고도 주위 사람들과 나눌 몫은 남는다. 감나무 아래로 오가며 과일 껍질이며 유통기한 지난 우유, 소금기 없는 밥 등을 묻으며 되뇌던 이름들을 떠올린다. 남편의 동료와 친구들, 나의 친구와 지인들에게 고루 나눠 줄 깜냥에 즐거운 고민이 쌓인다.

받는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닌지 모르겠지만 챙기는 손길이 분주하다. 남몰래 선물을 준비한 것처럼 은근한 즐거움도 누린다. 종종거리던 발길에 담았던 기대를 모아 따는 행복. 매끈하지 못한 감을 내밀면서 포장하지 않은 사랑을 전한다. 따로 약을 하지 않아 흉터투성이지만 내가 사람에게 쏟는 순수한 열정을 닮은 감이다. 감나무 끝에 소실점으로라도 붉은색이 안 보일 때까지, 수시로 마당을 오가며 정을 나눈 사람들을 생각한다. 감 익는 마당에선 추억이 돋아나고, 사람이 익어 간다.

요란한 새소리를 들으며 귀가하는 길, 습관처럼 감나무를 살핀다. 매서운 추위 아랑곳없이 얼다 녹다를 반복하며 당도를 키워가는 감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무채색의 계절, 나무 냉장고에 환한 꽃등으로 매달린 저기 저 마음을 뚝 따 보낼 이 어디 있나. 오늘도 그리운 이름 하나 더 찾으려 두릿거린다.

심명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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