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론으로 물건을 배달받고 자율주행차에 앉아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며 목적지에 가는 일이 가능해졌다. 우주로 여행을 가고 냉동상태였던 인간이 다시 삶을 살게 되는 세상. 도시의 수직농장에서 30모작을 할 수 있으니 정말 인간의 상상력과 능력은 놀랍기만 하다.

지금까지 과학은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 왔으니까 복제 인간과 유전자 조작 인간도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 그게 과학의 몫이지만 잠시 멈춰서 인간이 걸어갈 길에 대해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를 보내지 마》(가즈오 이시구로 글, 민음사)를 읽으며 들었다.

영국의 기숙학교 헤일셤. 학생들에게 예술 활동과 체육 활동의 기회를 많이 주는 학교다. 그들은 도서실의 커다란 참나무 탁자에 둘러 앉아 희곡을 낭독했고 연못 주변을 거닐며 우정을 나눴다. 간병사, 기증, 장기 같은 낯선 단어만 없으면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학교.

그들은 자신들이 복제 인간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근원자에 대해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근원자를 찾아내면 그를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거라고 본 학생이 있었고, 근원자에 대해 신경 쓰는 건 어리석다고 여긴 학생이 있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낸 표현은 달랐지만 진짜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이냐에 대한 고민은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점이기도 했다. 사랑에 빠진 캐시와 토미가 교장을 찾아가 집행 연기를 받으려 했던 것도 몇 년 간이라도 둘만의 삶을 살겠다는 결심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희망적인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교장이 헤일셤을 세운 이유는 복제 인간도 영혼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시와 그림에서 그걸 확인하곤 기뻐했지만 교육을 받아서 교양이 있는 복제 인간을 키우는, 딱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알고 보니 수많은 학생들이 통탄할 만한 환경에서 사육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클론은 그저 의학 재료를 공급하기 위한 존재에 불과했다. 불치병으로 간주되던 많은 병들이 치유될 수 있는데 그 통로인 복제 인간을 포기할 수 있나. 후퇴라는 말을 도저히 꺼내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린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복제 인간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별개의 존재라고,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거칠고 잔인한 세상. 그들이 바라본 우리네 삶이다. ‘인간답다, 인간답지 않다’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고 그 고백의 무게를 감당할 힘이 우리 인간에겐 없는 걸까.

아버지의 덧없는 죽음과 중환자실로 실려 가던 딸의 모습을 보면서 아프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치매에 걸려 나 자신의 존재를 잊기 전에 예방법이 나오길 희망한다. 더 이상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아기가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삶을 위해 복제 인간이 필요하다면 잠시 숨을 고르고 싶다. ‘나를 보내지 마’라는 말이 절규처럼, 체념처럼 들려서다. 한없이 ‘인간적’인 이들의 존재 앞에 저절로 숙여지는 고개. 앞으로 살아갈 길이 숙제다. 부디 내가 잘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책을 곁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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