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꼴뚜기 대구 명태 거북이... 아주 젊은 분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세대에 걸쳐 계신 분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법한 독도는 우리 땅 노래의 한 부분이다. 이 노래가 나왔던 시기가 1980년대였으니 어림잡아도 벌써 3,40년이 다 되어 가는 것인데, 그 동안 몇 번인지 가사가 개사된다는 이야기가 나왔었고, 실제로 저기 나오는 대구 명태 오징어 등이 어획량의 격변을 보이며 우여곡절을 겪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3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으니 바다도 변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할 것이다. 십여년 전에는 동해안 수온의 변화로 인하여 대구와 명태가 거의 잡히지 않게 된 뉴스들이 꽤나 자주 등장했었고, 최근 3,4년 전부터는 오징어의 어획량이 급락하여, 이제 동해에서 오징어를 잡는 이야기가 옛말이 될 수 있다며, 위기감이 고조되었었다.
오징어. 아시아권을 제외하고는 식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은 해산물이다. 물론, 요리 문화가 발달된 지중해권, 남유럽권 등에서는 오징어를 식자재로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그 외의 서양권이나 이슬람 문화권 등에서는 그렇게까지 인기있는 음식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등에서는 과거부터 풍부한 어획량을 바탕으로 빈부(貧富)를 막론하고 맛있게 즐길 수 있는 대표적 해산물이다. 회로도 먹고, 데쳐도 먹고, 말려서 건어물로도 먹는, 한국인 들에게는 그야말로 국민 해산물 칭호를 받아도 아깝지 않은 그러한 생선이다. 그런 오징어의 어획량 감소는 어민들에게 경제적 타격으로 다가왔을 뿐 아니라, 동해안 생태계의 변화에 대한 위기감 고조, 중국 어선들의 불법 어로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 법. 한국인들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는 지 오징어는 지난 3,4년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획량 급감으로 오징어잡이 배를 파는 어민들부터 시작하여, 수산물 유통에도 상당한 타격이 왔다. 어느샌가 오징어는 ‘금징어’라 불리우기 시작하였다.
혹시 오징어라는 말이 은어로 ‘상대적으로 못생긴 사람’을 뜻한다는 사실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실지 모르겠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조금 설명하자면 이런 경우다. 국내에서 가장 잘생겼다고 일컬어지는 장동건이나 원빈을 보고 옆을 돌아보면, 자기 옆에 있는 남자친구나 애인이 ‘오징어’로 보인다는 그런 이야기다. 이러한 류의 이야기가 몇 번 인터넷상에서 유행한 후, ‘오징어’는 어쩐지 ‘못생긴 사람’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다. 풍부한 어획량 때문에 서민들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생선, 다리가 10개이며 눈이 머리 쪽에 붙은 희한한 생김새 등도 오징어의 그러한 이미지 고착에 이바지한 감도 있다.
그렇게 놀려대서는 아니겠지만, 오징어는 지난 몇 년간 우리 곁을 떠났었다. 곁에 있을 때는 모른다고, 국민 해산물 오징어의 부재가 가뜩이나 팍팍한 서민들의 생활에 더욱 우울감을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금징어’가 된 것이다. 우리는 가장 흔한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며,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꽤나 자주 이야기 듣곤 하지만 정작 깊게 깨닫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옆에 있다는 교훈처럼, 오징어도 항상 우리 곁에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잃기 전까지는 그냥 ‘흔한, 못생긴, 싸구려의’ 해산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 그것을 잃어봐야만 그 소중함을 깨닫는 인간의 본능적 어리석음,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고쳐지지 않을 근본적 인간의 본성이지만, ‘금징어’가 되어야만 비로소 그 귀함을 깨닫는다는 사실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올해 들어 최근, 동해안에 오징어가 풍년이다. ‘금징어’였던 귀하신 몸이 몇 년만에 다시금 서민의 식탁에 제 모습으로 돌아올 듯 하다. 유통의 문제로 아직 가격은 제대로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지만, 결국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가격은 떨어질 것이 자명한 사실. 몇 년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못생긴, 싼, 흔한’ 그렇지만 그 ‘소중한 것’을 맛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