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다. 근무하는 건물의 뒤뜰에 목련이 활짝 피었고 벚나무는 은밀한 곳을 보이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주는 낮선 풍경은 계속되어지고 있고 국회의원 선거로 어수선하고 탐욕스럽지만 시간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때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살아낸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것을 먼저 충실하게 한다. 때에 맞추어서 자신이 살아내야 할 것들에 최선을 다한다. 자연은 하나님의 계시를 품고 있으며 그래서 자연은 위대하다.

개학은 연기할지 말지를 놓고 인간의 머리를 짜낸다. 나약한 모습이지만 최선을 다하는 행동이라 묘수가 있겠냐고 핀잔을 줄 수도 없다. 늘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간만이 가져왔던 지혜가 발휘되길 바란다.

투표용지 길이가 0.5미터가 넘어서 18년 만에 사람 손에 의해서 일일이 개표를 해야 한단다. 우리 정치가 18년 전과 수준이 똑같다는 상징이다. 작년 그 요란을 떨면서 만든 인간의 지혜가 이런 정도였음을 보여준다. 나라의 녹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피어나는 벚나무에서 부디 배우길 바란다.

인간은 통합적이다. 동물로서의 생물학적 본성이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영성과 인격성 그리고 도덕성도 부여받은 존재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 개인이 자신의 본질을 선택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그 무엇도 될 수 있다.

이 선택에 대해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모든 종교는 경고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자존감을 부여하고, 존엄한 존재로 살아갈 때 인간은 영적존재이며, 하나님을 닮은 지성적이고 인격적인 인간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의 본성에 기초해 자유의지를 욕망의 엔진으로 작동할 때 인간에 대한 모든 왜곡과 차별은 우리의 것이 된다.

 

우리에게 생명은 시간을 통해 주어진다. 공간을 통해 주어진다. 사람을 통해 주어진다. 사회와 역사가 시간의 구체성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인간의 품위와 존엄을 먼저 선택해야 한다. 아무리 꿩 잡는 것이 매라고 해도 정도껏 해야 한다. 돌멩이와 모래의 차이는 크기 때문이다. 4월15일은 국회의원 선거이고 다음날은 세월호에서 304명의 생명이 사라진 날이다.

봄은 볼 수 있는 계절이라 봄이라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 올해의 부활주일은 4월12일이다. 무엇보다 나의 눈이 떠지길 바란다. 그래서 이 봄날 생명의 힘을 먼저 보기를 원한다. 부활주일 앞선 주일을 고난주간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패션 위크(Passion Week)’라고 한다. ‘패션’에는 ‘고난’과 ‘열정’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당시 예수라는 사람은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지배체제에 열정적으로 저항했고 저항의 필연적 결과로 고난과 죽음을 마주했다. 고난주간은 그런 것이다.

올해도 별 수 없이 머리 좋고 염치없으며 뻔뻔한 사람들의 호구가 된 기분이다. 나도 비록 별 수 없는 어둠의 사람이지만 지금 이 시간이 먼저 빛을 선택하는, 사랑을 선택하는 카이로스임을 보려고 한다. 어둠을 지적하지 말고 먼저 빛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것은 사랑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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