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호 식당〉(박현숙 글, 특별한서재)에 앉아 메뉴판을 든다. 천 명의 피를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여우, 서호. 그가 내민 조건은 간단하다.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 사십구일 동안 다른 이름과 얼굴로 사는 대신 뜨거운 피 한 모금을 그에게 주면 된다.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유명 호텔 쉐프였던 민석과 열다섯 살에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도영이. 둘은 사십구일 동안 식당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런 죽음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풀어 나간다.

민석은 사랑했던 지영을 찾기 위해 새로운 메뉴를 개발하곤 재료를 알아맞히는 이벤트를 벌인다. 반면에 도영은 처음부터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우연히 동행한 민석이 애걸복걸해서 받아들였을 뿐.

그의 과거는 상처투성이다. 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르다 돌아가셨고, 얼굴도 모르는 엄마는 소식이 없다. 가족이라곤 완전 양아치인 이복형과 얼굴만 봤다하면 화를 내고 악담을 퍼붓는 할머니가 전부. 게다가 스쿠터를 훔쳐 타다가 사고를 냈으니 반가워할 리가 있나.

그런데 운명처럼 알바를 하러 나타난 형을 통해 할머니의 진심을 알게 된다. 할머니는 유독 도영이만 미워한 게 아니라 형에게도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형은 그걸 할머니의 성격으로 받아들인 반면에 도영이는 자신의 처지와 엮어 본인만 미워한다고 지레짐작했던 거다.

도영이를 보면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함부로 여기는 사람, 시어머니가 떠올랐다. 나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특별히 잘한 것도 없지만 욕먹을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쩌면 저러나 싶어 마음고생이 심했다. 외면도 했다가 미워도 했다가...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 내 안의 어떤 상처가 시어머니의 말과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아니었나 싶더라. 어릴 적 엄마를 구박했던 고모는 목소리가 크고 직설적인 성격이었다. 그 고모에 대한 거부감이 비슷한 몸집과 성격을 가진 시어머니에게 나타난 건 아니었나 싶은.

시어머니는 딱 도영이 할머니다. 며느리인 내게 더 지나치게 구시는 부분도 있겠지만 다정다감하거나 참는 성격과 거리가 멀다. 특별히 사람을 봐가며 얼굴을 바꾸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당신 자식들은 그런 성격을 으레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데.

그 분에겐 실컷 욕을 퍼부어도 그 마음에 담긴 진심을 미루어 짐작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나타나는 며느리가 제격이었던 것. 결국 우리는 서로를 잘못 만났을 뿐,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하고의 잣대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다.

청소년 소설로 마주친 내 안의 상처. 인간이 낼 수 있는 마음의 길이라는 것이 얼마나 섬세해야 되는지 실타래처럼 풀어간다는 평을 듣는 작가의 힘을 제대로 느낀다. 너무 멀리 온 지금, 식당 밖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고 사람의 길은 여전히 쉽지 않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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