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직동》(한성옥, 김서정 글과 그림, 보림)이라는 그림책이 출간되었다는 글을 읽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간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회사가 사직동에 있었는데 거기서 16년을 근무했으니 사직동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인 셈이다.

우리 회사에서 세종문화회관이 있는 광화문 광장은 불과 10분 거리. 그럼에도 점심을 먹고 나면 발길은 빌딩숲이 아닌 사직공원과 도서관 혹은 회사 뒤편에 있는 동네로 향했다. 북적대는 거리보다는 한적한 동네를 걷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 동네엔 성곡미술관이 있었는데 입장료가 무료였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을 봐도 좋았고 그냥 골목골목을 걸어도 좋았다. 특히 담쟁이덩굴로 덮인 오래된 집이 참 예뻤는데 책을 읽어 보니 일제시대에 지었다는 저자의 집이더라.

단순히 낯선 동네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 책에 끌렸을까. 나는 이 책에서 내가 살던 동네를 봤고 또 잃어버린 동네를 봤다. 그래서 책은 《나의 사직동》이지만 저자만의 사직동이 아니라 누구나 공감하는 사직동인 거다. 그래서 지금껏 많은 이들이 찾는 지도 모르겠다.

책은 소박하고 정겹다. 자그마한 한옥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동네와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따뜻한 웃음을 짓는다. 고개를 돌리면 마당에서 무며 호박이며 가지를 말리던 나물 할머니가 말을 건넬 것 같고 대문 앞에 나와 앉아 파마 약으로 머리를 말던 이웃집 할머니와 눈이 마주칠 것 같다.

모퉁이 집엔 책이 잔뜩 꽂힌 가게가 있다.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는 아줌마 옆에는 귀가 긴 강아지 캔디가 있고 해마다 몇 번씩 몇 학년인지 묻고는 세월 참 빠르다고 감탄하는 슈퍼 아저씨가 계신다.

그런데 갑자기 도심재개발사업이 진행된다는 현수막이 걸린다. 곧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리고 세 사는 사람은 어쩌냐고 푸념하던 주희 할머니는 동네를 떠난다. 꽃집이랑 치킨 집도 부동산 사무실로 바뀌고 저자도 홍파동으로 이사를 한다.

우연히 찾은 옛 동네. 커다랗게 입을 벌린 구덩이 위로 얼기설기 엮인 철근과 타워크레인만 버티고 섰다. 한쪽에선 굴착기가 쇠갈퀴 손으로 땅을 파고 있고. 저자는 마음에 구덩이가 푸욱 파이는 것 같고, 쇠갈퀴가 뱃속을 긁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다시 사직동으로 돌아간 저자. 하지만 사직동 129번지가 아니라 모닝팰리스 103동 801호다. 노는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 사직동이지만 ‘나의 사직동’은 아니라는 말이 아프다.

내가 태어나서 살던 집도 없어졌다. 집만 없어진 게 아니라 온 동네를 대형교회가 삼켜버린 거다.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큰 건물에 눌리곤 한다. 그래서 아파트가 거둬간 동네를 그리워하는 저자의 마음을 잘 안다.

애초부터 아파트에서 산 아이들은 그 나름의 추억을 만들겠지만 아파트에서 만든 추억이 가난한 나는 자꾸 옛날이 그립기만 하다. ‘아파트도 좋지만 이런 동네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책 속 반장 할아버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나의 말이 되어 나온다.

나의 월계동, 나의 사직동 그 다음은 어디일까. 어디든 마당이라고 할 만한 땅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혼잣말을 해서 입에 군내 나는 걸 막고 싶지는 않다. 안녕하냐고 물을 이웃이 너무 멀지 않다면 추억은 끊임없이 만들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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