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되도 않는 엉뚱한 꿈을 꾸곤 한다. 가령 1920년대에 지금 이 나이로 살고 있다면, 룸펜들을 위한 분위기 좋은 쉼터 하나 차리고 싶다는 생각.

책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제2의 성장기처럼 자신에게 집중할 시기, 열린 관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게 좋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영역에 물들어 갈 수 있는 편한 공간 하나 갖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속 주인공 길은 현시대에 살면서 1920년대를 그리워한다. 그러다 파리 밤거리에서 실제 시공을 이동해 원하는 시대로 들어가 낭만을 만끽한다. 피츠 제럴드 부부를 만나는가 하면, 헤밍웨이, 피카소, 고갱 등과 교류한다.

그야말로 책에서 본 예술가들을 마음껏 만난다. 게다가 길은 그 시대에서 호흡이 척척 맞는 아드리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려고 한다. 헌데 아드리아나는 벨 에포크 시대라는 또 다른 시대에 호기심을 느껴 가 버린다. 길은 1920년대가 그리워하지만, 그 시대 속에 사는 아드리아나는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한 것이다.

근현대 소설에 탐닉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로라하는 한국 작가들의 소설 속에 그려진 1920년대는 사춘기 시절 내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일제 강점기의 아픔을 구체화할 수 없는 시기여서 작가들은 소설 속에 낭만적인 모습을 그려냈다.

시골에서 자라 많은 것을 접해 보지 못한 내게 문화예술인들이 자유롭게 교류를 나누는 모습은 참 멋져 보였다. 건강 때문에 금연에 목소리를 높인 때도, 음주가 사회 문제화 되던 시기도 아니었다. 좋아하는 현진건의 단편들이 쏟아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왠지 낭만적일 것 같은, 그런 시기.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오래 전부터 그 시대가 그리움으로 자리잡았나 보다. 나 또한 길이나 아드리아나처럼 어떤 시기를 꿈꾸고 있었다. 타임슬립해 들어가 종로 골목을 지나가다 보면 글을 쓰는 누군가를 만날 것만 같다.

내가 갖고 싶은 공간에서는 누구나 편하게 교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차를 마시며 밥을 먹고, 술이 한 순배 돌기도 하겠고, 날씨에 따라 lp판 위에서 음이 튀는 음악이 흘러나올 수도 있으리라. 빨갛게 충혈 된 눈으로 한 줄 시의 의미를 더듬어 찾으며 희열을 느낄 날도 분명 있을 테지.

밤이 지나도록 글 한 편 놓고 각자 기억에서 꺼낸 이야기로 덧입혀 원작과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글 한 편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설익은 음악을, 또 누군가는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는 그림을 놓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울기도 웃기도 하며 시시콜콜 삶과 작품을 이야기하는 동안 시간은 한가로이 흐를 게다. 내 안에 꽁꽁 갇혀 있던 젊은 시절과 달리, 다른 사람들에게 넓게 열려 있는 관심을 마음껏 나눌 수 있는 공간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느리게 빠르게 거칠게 부드럽게 호쾌하게 슬프게, 동사를 수식하는 세상 모든 부사로 채워지는 곳을 꿈꾸면 욕심일까.

1920년대에 다녀온 길은, 그 시대에서 또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아드리아나를 보며 현재로 돌아와 글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다. 나도 낭만적인 시대를 그리워하며 글을 잘 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글에 대한 관심이 길을 1920년대에 데려다 놓은 것처럼, 나에게도 좋은 글을 쓰고 싶은 갈증이 있기에 묵혀둔 생각이 깨어난 것 같다. 닭이 먼저인지, 계란 먼저인지 순서는 잘 모르겠지만, 누구나 상상 속의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나 보다.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내가 붙잡고 싶은 시기는 살아보지 못한 느린 세상이다. 뿌연 담배 연기 속에서 글에 집중해 들어가던 근현대 작가들이 내게 말을 건다.

애정은 망상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엉뚱하고도 특별한 꿈이 연주될지, 그냥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지 모르지만 나의 생각은 천천히 항해를 한다. 닻을 어디에 내리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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