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았다 / 할머니의 꽃 같은 시절을 / 할머니의 밝은 모습을 / 할머니께서 햇볕을 받으며 / 산책도 가고 / 노래도 배우며 / 우아하게 사시는 모습을 // 나도 할머니를 본받아 / 해바라기 같은 어른이 되어 / 꽃 같은 인생을 살고 싶었다 / 평생 밝고 활기차게 살고 싶었다 // 그런데 햇볕이 너무 /뜨거우셨을까 / 꽃도 영원히 꽃일 수는 / 없는 것일까 / 할머니는 그늘을 찾아 / 숨어버렸다 // 화창하고 활기찼던 / 우리 할머니 / 이제는 방구석에서 / TV만 보며 / 시들어가고 계셨다 / 지금의 할머니는 / 전혀 화창해 보이지 않는다 // 그래서 나는 여쭈어본다 / 할머니, 그늘이 좋아? (안산진흥초, 김민준)

조카가 6학년 때 어느 백일장에서 쓴 시다. 나는 조카가 썼다는 이 시를 읽고 눈물을 쏟았다. 엄마의 모습을 어떻게 이렇게 담담히 담았는지...

엄마는 꽃을 좋아하셨다. 손바닥만한 마당에 목백일홍과 앵두나무를 심으셨고 어느 한 시절 서운하지 않도록 계절마다 피는 꽃을 고루 챙기셨다. 덕분에 마당엔 늘 빛이 넘쳤다. 엄마는 그 마당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는데 이런저런 일이 생겨 그 빛을 잃으신 거다.

그 아이의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니 그동안 놓쳤던 많은 것들이 다가왔다. 다시 엄마의 손을 잡는다. 시 한 편으로 한 뼘이 자란 셈이다. 글은 나를 보는 거울이니 부지런히 읽고 닦아 제대로 된 어른의 길을 가야겠다.

그렁께 니 아부지, 아부지가... / 아녀, 그만 들어가 /딸깍 // 전화는 끊겼다. 또 꿈에 아버지를 보신 게지 나는 잠깐 혼자 남겨진 엄마를 생각했고 TV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설거지를 마쳤다 // 그렁께 그 머시냐, 머리끄락이, / 머리카락이 뭐어? / 거시기 말이여 / 딸깍 // 사흘 후에 온 전화도 싱거웠다 나는 새우깡 한 봉지를 아작내며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 ...... / 엄마, 울어? / 금메 밥 묵는디, 밥을 묵는디... // 천리 밖에서 울음이 건너왔다 늦은 저녁을 먹는데 흰 머리카락이 밥에서 나왔단다 울음이 목에 걸려 밥을 삼킬 수가 없단다 지난번은 장롱 밑 지지난번엔 서랍에서 아버지를 보았단다 아무 데나 머리끄락 흘린다고 타박을 줬는디... 니 아부지 세상 버린 지 석 달인데 아직도 구석구석 살아 있당께 우리 엄마 우신다 늙은 여자가 아이처럼 운다 (머리끄락)

마경덕 시인의 《사물의 입》(도서출판 가림토)도 조카의 시처럼 내 마음을 한바탕 흔들었다. 시집의 제목처럼 일상에서 건져 올린 시들이 퍼덕거리니 대책 없이 빠져들 밖에. 우리의 주변을 서성대는 대상물에서 삶과 우주를 관통하는 어떤 비의를 발견한다는 말이 꼭 내 마음이다.

나는 왜 시를 읽는가. 왜 시를 쓰고 외우는가. 사람과 자연을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하고 싶어서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게 사랑 아닌가. 날마다 삶이라는 선물을 받는데 사랑 말고 무엇을 주랴.

뜬구름 잡듯 외로움, 이별만 줄줄이 늘어놓는 시는 당분간 사절이다. 온갖 어려운 말로 포장해서 한참을 생각해야 하는 시도 싫다. 조카의 시와 마경덕 시인의 시에 빠진 즐거운 후유증이다. 현실을 단단히 딛고 곁에 있는 이름들을 들여다보는 시에 나를 맡기겠다. 이 가을은 여느 가을과 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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