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심장으로부터 먼 곳에서부터 푸르게 변하는 몸을 보니 조바심이 일었다. 죽음이 구체화되는 징조 앞에서 병실 복도의 긴 그림자를 보는 내 눈빛은 심하게 흔들렸다.

어떻게든 시어머니께 인사를 드려야 했다. 피하고 싶은 순간이 가까이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에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럼에도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자꾸 입 안에서 뱅뱅 돌기만 했다. 시어머니를 배웅하려고 가족 모두가 지키고 있는 병실에서 몇 마디 말로 내 진심을 꺼내 보이기가 힘들었다.

청력이 끝까지 살아 있다는 말을 믿고, 조용히 어머니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아 드렸다. 나머지 한쪽은 내 귀에 꽂았다. 그리곤 산울림의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노래를 같이 들었다. 애달픈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노래로 전한 내 고백을 어머니가 잘 안고 가셨으리라 믿는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노래는 계속 남아 내게 시시때때로 말을 건다. 울음을 터트리지 못할 땐,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같이 암과 싸운 연대감이 있어서 어머니가 떠나니, 세상에서 나를 온전히 이해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에 허전해졌다.

눈 찡긋하며 서로의 건강을 챙기던 일도 할 수 없다. 자고 일어나면 어머니 없는 세상이 싫어 서둘러 생각을 둘둘 말아 던져두며, 한동안 상실의 시간들을 외면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네” 슬픔이 커도 눈물에 인색한 며느리일 수밖에 없는 나를 노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추억은 지난 이야기 아니요 두고두고 그 모습이 새로우니” 과거가 이야기를 건 다음부터 조금씩 가벼워질 수 있었다. 기억 속 어머니는 한 사람으로 멋지게 내 앞에 섰다. 어머니는 살아생전 다른 사람에게 신세지는 걸 싫어해 없는 살림에도 챙겨 주는 걸 좋아했다.

자주 전화 드리지 못하는 내게 꾸지람보다는 따뜻한 안부를 건네던 어머니였다. 자식들에게 공평했고, 되짚어보면 ‘어른’의 모범 답안을 보여 주시려고 늘 노력했다. 예전에 미처 몰랐던 모습들이 새롭게 다가와 어머니가 커질 때마다, 어머니처럼 살 거란 삶의 지표를 하나씩 세운다.

신기하게 추억 속에서는 서릿발 같았던 꾸지람에도 웃고 만다. 과거는 자꾸 향기를 뿌리고 있고, 그 향기 덕분에 나는 치유를 받고 단단해지고 있다. 대상이 눈앞에 없다고 사랑이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게다.

노래가 갖는 위로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나는 노래를 들을 때 멜로디보다는 가사에 집중해듣는 경향이 있다. 물론 멜로디만으로도 감흥이 일긴 하지만, 마음을 깊게 치고 들어오는 것은 대부분 노랫말에 공감을 하는 노래들이다.

시를 읽듯 노래를 듣고 읽다 보면, 툭툭 건드려지는 마음을 만난다. 유리왕의 황조가가 어떤 리듬으로 불려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노랫말을 통해 다정한 꾀꼬리를 보며 외로움에 빠진 한 인간을 오롯이 만나니, 토닥여 주고 싶어진다. 산울림의 노래에도 가사에 크게 흔들리고, 위로받았다.

어느 수집가는 “인간의 감정과 본능을 그대로 드러낸 노랫말이야말로 자연의 참된 모습”이라고 했다.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도 얼마나 솔직 담백한가. 있는 사실대로 이별을 노래하고, 이별 후를 이야기한다. 눈물이 안 나오면 안 나오는 대로, 추억에 매달리면 매달리는 대로 가사는 날것 그대로 감정의 길을 낸다. 혼자지만 늘 어머니와 함께 노래 부르는 느낌으로 그 길에 내가 붙들려 서 있었다.

오랜만에 산울림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속속들이 들리는 가사에 갑자기 눈물이 터진다. 어머니를 보내 드린 지 3년 만에 꺼이꺼이 울어본다. 장례식장에서 터트리지 못한 울음을 비로소 마음껏 토해낸다. 뒤늦게 나만의 애도의식을 치루고, 어머니를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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