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아버지가 일 년에 딱한 번 어두워져도 외출을 허락하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정월대보름이다. 여자는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규율 중, 해지기 전까지 집에 들어오라는 걸 가장 지키기가 힘들었다. 해 꼴깍 넘어가는 순간, 손에 든 공깃돌 집어던지고 집으로 뛰어가느라 땀범벅이 된 게 어디 하루 이틀이랴. 그런데 뜀박질이 필요 없는 하루라니.

두둥두둥, 보름이 되기 전부터 이미 내 마음은 보름달 위에 앉아 있다. 친구들과 며칠 전부터 누구네 집에서부터 들러, 어디서 놀 건지 궁리하는 데 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행여, 기분 나빠진 아버지가 외출 금지라도 시킬까 봐 보름 근처에 조심스레 행동하는 것마저도 내겐 보름 전야제나 마찬가지였다.

보름날이 되면, 엄마는 자식들을 깨워 제일 먼저 부럼을 깨게 했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부럼을 깨고 나서야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더위를 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매번 짓궂은 오빠의 더위를 사야 했기 때문에 팔 더위는 내겐 곱절이나 되었다. 친구들도 사정이 비슷한지 멀리서 부르면 다들 모르쇠로 일관하니, 더위팔기는 참 힘든 일 중 하나였다. 더위를 팔지 못해 실망하면 엄마가 내 더위를 사 주셨다. 어린 마음에 농사 짓는 엄마가 더위 먹을까 봐 엄청 걱정하며 팔았다.

더위를 팔고 나면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친구들과 깡통에 구멍을 뚫어 나뭇가지며 마른풀을 섞어 넣고 저녁에 돌릴 망우리를 준비했다. 구멍 뚫기가 힘들어 한참을 낑낑대야만 완성되는 망우리 깡통. 완성한 망우리가 바뀔까 봐 신주단지 모시듯 집에 갖다놓고 다시 만나 고무줄놀이, 술래잡기를 하다 보면,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해와 달의 경계쯤이 되면 우리는 일제히 아빠 없는 금희네 집으로 갔다. 금희 엄마는 다른 엄마들보다 집에 친구들 모이는 걸 엄청 좋아하셔서 모든 편의를 봐 주시곤 했는데, 보름날에도 우리들을 위해 커다란 양푼을 내 주셨다. 양푼을 들고 무리를 이루어 동네 곳곳을 누비며 보름밥을 얻으러 다니는 게 어찌나 신나던지. 달 밝은 밤, 개 짓는 소리와 함께 “밥 주세요.”라고 목청 크게 외치는 우리의 소리는 시골 마을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돌다 우리 집에 들렀을 때, 다른 집에 비해 푸짐하게 내놓는 엄마의 오곡밥과 나물들은 자랑스러웠다. 혹여나 집에 들렀을 때 아버지에게 잡히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안도로 바뀔 즈음의 짜릿한 쾌감도 잊지 못한다. 늦은 밤, 또래들과 함께 금희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한층 더 경쾌해졌다.

각 집에서 얻어온 밥과 나물을 넣고 고추장 넣어 비비는 건, 제일 나이 많은 언니가 했는데, 그 잠시를 기다리는 게 어찌나 길던지, 숟가락 들고 덤빌 때까지 침은 꼴깍꼴깍 잘도 넘어갔다. 몇 끼 깜냥은 되는 듯한 밥도 전투 식량 먹어대듯 덤비면 금방 바닥났다. 우리는 터질 것 같은 배를 움켜잡고 각자 집으로 가 낮에 만들어 놓은 망우리 깡통을 들고 모였다. 한번 산불이 난 뒤로는 어른들이 금기해 산에 오르는 건 포기하고 불이 나지 않을 논바닥 가운데서 망우리를 돌렸는데, 내 건 매번 피식거리기만 하고 제대로 불탄 적이 없었다. 망우리 돌리기를 하다 시시해지면 술래잡기도 하고, 꼬리잡기도 하며 한 밤을 꽉꽉 채워 놀았다. 엄마 손에 끌려 집으로 가면서도 얼마든지 더 놀 수 있을 것 같은 환한 밤이 어찌나 아쉽던지.

세월이 흘러, 망우리를 편하게 돌릴 공간도, 이웃집에 오곡밥을 얻으려 다니던 풍습도 거의 사라졌다. 그래도 정월대보름은 여전히 설렘 가득한 명절이요, 밤늦게까지 맘껏 놀았던 나만의 날이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분주하게 묵은나물 반찬을 만들고, 오곡밥을 짓는 것은 어린 시절의 즐거운 기억 덕분이다. 올해도 보름날이 가까워온다. 지난 봄 사다 말린 취나물이며, 고사리를 꺼낼 시간이다.

심명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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