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이라도 눈을 쏟아낼 듯 하늘이 잔뜩 찌푸렸다. 공기는 눅눅한 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다. 이런 날 외출했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며칠 전부터 마른 꽃들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날씨와 제법 어울리는 일이다.

거실에 보자기를 넓게 펴고, 집안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꽃다발을 한데 모은다. 수북이 쌓여 있는 마른 꽃다발 더미에서 풀내가 훅 끼쳐온다. 꽃다발 전한 이의 묵은 마음들이 올올이 다시 선다. 지난 일 년을 수놓았던 하루하루의 기억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다용도실 한켠에 있던 마른 꽃다발, 색은 발했어도 금세 그 꽃다발을 받았을 때의 느낌이 되살아난다. 둘째는 내 생일에 손 편지와 함께 꽃다발을 주며 짜증내던 것을 미안해했다. 싱싱하던 생명력, 매혹적이던 꽃 색깔들은 잃었지만 묵묵히 견디는 동안 돋을새김으로 박아놓은 아이의 마음이 또렷하다. 꽃 한 송이라도 아이에게 받은 것은 더 각별한 법인데, 다발이었으니.

난로 위에서 시간을 탈색하느라 처져 있던 수국 한 다발도 고개를 든다. 일산에서 달려왔던 스물여덟 살 제자가 놓고 간 마음이다. 군대 간다고, 결혼한다고. 굵직한 변화가 있을 때마다 안산으로 직접 와 소식을 전하더니, 올핸 스승의 날이라고 불쑥 찾아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여덟 살의 뽀로통한 마음을 열어 이십 년 동안 한결 같은 마음을 보여 주는 제자 덕분에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살짝 만져 보니 바스락거릴 줄 알았던 꽃잎이 습기를 먹어 부드럽다. 제자의 결 고운 마음을 닮았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꽃다발의 사연도 들척인다. 누군가의 시 속 주인공이 되고자 꽃집으로 달려가던 하루가 생각난다. 나를 위한 시를 썼다며 보내온 마음이 고마워 추위를 무릅쓰고 꽃집으로 달려가 시 속 장미를 사들고 왔었다. 꽃잎이 다 피면 설렘이 사라질까 걱정되어 하루 이틀 꽃병에 꽂았다가 그대로 걸어 두었다. 다른 꽃들에 비해 유난히 선명한 장미꽃 색깔이 그 사이 바랜 내 마음을 탓하는 것만 같다.

갈피마다 숨어 있는 마음들이 나온다. 구석구석 박아 놓은 기억도 많다. 지금은 색과 빛을 잃었지만 한때는 저마다 푸르디푸른 생명력을 자랑하던 꽃잎들이다. 꽃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과 꽃을 건네던 마음을 되새김질한다. 이 중 어느 것을 골라내야 하는지 별것 아닌 것에 마음이 쓰인다. 모양새로 보면 그저 그런 꽃잎일지라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기에 손길은 자꾸 주춤거린다.

과감해져야 한다. 다발을 묶었던 끈을 모두 풀어 꽃들을 섞어 놓는다. 섞어 놓으니, 좀 낫다. 골라내는 손길에 속도가 난다. 먼지를 털어내며 버릴 것을 따로 골라낸다. 준 마음을 버리는 게 아닌데도 마른 꽃 정리에 유난을 떤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가벼워지니 도리가 없다.

찻물 우려내듯 꽃다발을 꺼내 정리하는 건 나만의 일 년 정리법이다. 바쁘다고 던져두었던 마음들이 마른 꽃잎과 함께 살아난다. 살면서 좋은 일만 겪고 즐거운 인연만 만나라는 법은 없다. 지난 일 년, 유난히 복잡한 일이 많았다. 내 마음이 달리 전해지는 일들이 있었는가 하면 뜻하지 않게 기쁨을 준 일들이 있다.

꽃도, 기억도 모두 끌어안고 살 수는 없다. 나쁜 일, 어긋난 인연은 떨어져나가는 꽃잎과 함께 쓸어 밖에 버린다. 남아 있는 마른 꽃들을 흰 바구니 안에 공들여 꽂는다. 좋고 따뜻한 기억을 더 오래 붙잡고 살기로 한다. 흰 바구니 안에서 마른 꽃잎들이 다시 피어난다.

바구니를 창가에 올려두려니, 때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지나간 시간을 잘 마무리하고 다가올 날들을 기쁘게 맞이하라는 하늘의 축사다. 펑펑 내려라. 이왕이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심명옥 안산문인협회 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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