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법정, 류시화 글, 조화로운삶)의 한 부분을 떠올리며 한가위를 보냈다. 법정 스님이 갑자기 아들을 잃은 여인과 겸상할 때의 일이다. 짧은 식사 시간 동안 스님은 몸과 마음이 온통 고통과 슬픔인 여인이 하는 얘기를 다 들어주셨다. 간혹 그녀 앞으로 반찬을 끌어다 주기도 하고 어서 먹으라고 권하기도 하면서. 식사 후 여인의 얼굴에 안정과 평화의 분위기가 감돌았는데 그 이유는 스님의 집중에 있었다고 한다. 단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은 강렬한 집중이 그녀의 슬픔을 위로하고 나아가 그것을 삶의 한계에 대한 이해로 승화시켰는지 모른다는 얘기다.

한동안 법정 스님처럼 온 마음으로 집중하기는 어려우나 그래도 흉내는 내보자 마음 먹었으나 역시 채 몇 달을 넘기기 힘들다. 바로 명절 무렵에 대형 사고를 쳤으니 말이다. 코앞에 닥친 일로 마음이 바쁜데 남편이 명절 선물에 대해 말을 건넸다. 일단 냉장 보관하라고 해서 김치냉장고에 넣어 뒀으며, 그 중 한 개는 출장을 간 직원에게 전달할 것이니 꼭 챙겨 달라는 부탁을 얹어서. 대충 들으니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아닌 듯해 건성으로 대답하고 흘려버렸다.

그러다 뭐지 싶어 뜯어보니 유명 갈빗집의 양념 갈비. 오호라, 매년 마음에 들지 않는 선물만 하더니 올해는 웬일이냐 싶어 절로 신이 났다. 게다가 두 개라니!

“회사에서 무슨 일이래? 양념 갈비를 줬네.”

“한 개는?”

한 개라니. 남편의 황당한 표정을 보고 그제야 생각났다. 어제 귓등으로 흘린 말이 그 말이었구나. 허둥지둥 포장을 챙기긴 했으나 이미 뜯긴 흔적이 분명한 걸 다시 돌릴 수는 없는 일. 부랴부랴 그 갈빗집을 찾아야 했다.

남편은 내가 벌인 일을 양념 갈비에 눈이 멀어 순간적으로 저지른 아줌마의 실수라고 생각했을 거다. 아니면 그 흔한 갈비를 자주 사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한나절을 보냈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나는 나의 문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갈빗집을 찾아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동안 욕심껏 일을 벌여놓다 보니 머릿속이 늘 이런저런 궁리로 바빴다. 뭘 해도 깔끔하지 못한 미진한 느낌이 남고 일의 순서를 정하느라 정신없는 상태, 이게 요즘 내 모습이었다. 온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말을 대충 흘려 넘기니 이런 사달이 날 밖에. 드러나지 않은 크고 작은 소홀함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늘 말의 무게는 들고 사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말을 잘 하기 위해서는 잘 듣는 게 바탕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위를 둘러봐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잘 들어주는 사람은 많지 않더라. 그만큼 잘 듣기가 어렵다는 뜻일 터, 그 첫걸음이 법정 스님의 이야기라 반갑고 든든한 마음.

건성으로 들은 덕분에 푸짐하게 익은 갈비가 프라이팬에서 일갈하는 소리를 들었다. 부디 온 마음으로, 매 순간 집중해서 듣는 사람이 될 수 없느냐고. 그래야 나를 움직이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으니.. 듣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듣는 사람이 되기 위해 말을 건네는 상대방의 눈을 마주 보는, 아니면 최소한 그 사람을 향해 몸의 방향을 바꾸는 노력을 해야겠다.

황영주 안산문인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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